에드워드 7세 - 나무위키

에드워드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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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칭호3. 가족관계
3.1. 조상3.2. 자녀
4. 생애
4.1. 즉위 전4.2. 즉위 후
5. 사망과 장례6.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에드워드 7세영국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군주이자 인도 제국의 제2대 황제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으로 현 영국의 왕세자인 찰스 왕세자의 대선배격 인물이다.

2. 칭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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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인 칭호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해외 영국 자치령의 왕, 신앙의 수호자, 인도의 황제이신 에드워드 7세 폐하(His Majesty Edward VII, by the Grace of God, King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and of the British Dominions beyond the Seas, Defender of the Faith, Emperor of India)'이다.

3. 가족관계[편집]

3.1. 조상[편집]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작 앨버트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로이스에보스도르프의 여백작
아우구스테 카롤리나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공녀 루이제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아우구스투스
(Augustus, Duke of Saxe-Gotha-Altenburg)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여공작
루이제 샤를로테
(Duchess Louise Charlotte
of Mecklenburg-Schwerin)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조지 3세
(George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공녀 샬럿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로이스에보스도르프의 여백작
아우구스테 카롤리나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3.2.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클라렌스와 애번데일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2남
조지 5세
(George V)
테크의 메리
슬하 5남 1녀[2]
1녀
프린세스 로열 루이즈
(Louise, Princess Royal)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슬하 1남 2녀
2녀
빅토리아 공주
(Princess Victoria)
3녀
노르웨이의 왕비 모드
(Maud, Queen of Norway)
3남
웨일스의 공자 알렉산더 존
(Prince Alexander John of Wales)

4. 생애[편집]

4.1. 즉위 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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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년 11월 9일, 버킹엄 궁전에서 빅토리아 여왕앨버트 공의 장남(둘째)[4]으로 태어났다. 출생 1달 만인 같은 해 12월 8일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된 것을 보면 여왕 부부가 아들을 진심으로 갈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장장 60년 동안 프린스 오브 웨일스 자리를 지키다가 60세에 왕으로 즉위해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세자로 지낸 기록을 세웠으나 이 기록은 2017년 9월 9일부로 고손자인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에 의해 깨졌다(…).

고대하던 아들의 탄생이라 기대치가 높아서 그랬는지 여왕 부부는 에드워드 7세를 7살 때부터 매우 엄하게 훈육했는데, 그가 여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총명한 누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 공주[5]와 비교되면서 여왕으로부터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그에 대한 반동이었는지, 에드워드 7세는 자녀 교육을 그리 엄하게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행실에 대하여 지적하러 갔던 앨버트 공이 이때의 무리로 인하여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여왕은 남편의 죽음을 에드워드 7세의 탓으로 돌리고 아들을 보지 않았다. 또한 에드워드는 엄격한 성격의 어머니와 관계가 좋지못하여 어머니가 몇십 년간 정사에도 일절 관여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왕세자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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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시절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여러 여배우들과의 염문설이 파다했으며, 부모의 금슬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가장 아름다웠다는 오스트리아의 황후이자 헝가리의 왕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와 유일하게 견줄 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던[6]덴마크의 알렉산드라 왕비와는 신혼 초를 제외하고는 평생 관계가 냉담했다. 그리고 이 부부관계 패턴은 100년 뒤에 고손자 에 의해 스핀오프 되었다.

부부 사이가 나빠진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에드워드 7세는 지적이고 위트있으며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인 반면, 알렉산드라 왕비는 그다지 지적인 편은 아니었고 얌전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는 내향적인 성격이었다. 또 알렉산드라 왕비의 목에 있는 수술 흉터를 결혼 첫날 밤에 본 에드워드 7세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놀란 점,[7] 알렉산드라 왕비가 불감증(!)이었다는 점,[8] 알렉산드라 왕비가 20대부터 귀가 먹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정상적인 의사소통마저 힘들어진 점 등이 있다.

이들의 사이가 얼마나 좋지 않았냐면, 에드워드 7세가 아내의 눈앞에서 대놓고 애인 앨리스 케펠[9]을 침실로 끌어들이는가 하면, 그가 앨리스와 산책하고 있는 걸 본 알렉산드라 왕비"돼지 한 쌍이 뜰을 산책하고 있다."고 폄하할 정도(…). 밑에서 설명하겠지만, 에드워드 7세는 심각한 비만 체형이었다.

비록 부부 사이는 신혼 초를 제외하고는 평생 냉담했지만, 알렉산드라 왕비는 3남 3녀를 낳았다.

알렉산드라 왕비는 자녀들에 대한 집착이 심해서[11] 루이즈 공주모드 공주가 각자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려 하자 엄청 화냈다고. 가장 순종적이었던 빅토리아 공주만이 미혼으로 남아 알렉산드라 왕비가 죽을 때까지 평생 수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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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라 왕비와 에드워드 7세. 왕비님 뽀샵질이 너무 과하신 듯.[12]

4.2. 즉위 후[편집]

빅토리아 여왕이 64년간 재위하면서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기에 에드워드 7세도 왕이 된 뒤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내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재위 말기에 로이드 조지[13]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영국 귀족원을 뜯어고쳤다. 즉 서민원이 결정한 일에 대해서 귀족원이 뒤집을 수 없는 체제로 만든 것이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냐면, 이 사건으로 자유당의 대대적인 개혁, 일명 인민예산이 통과되면서 영국은 복지국가로의 첫발을 떼게 된다. 물론 로이드 조지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자유당파 귀족들만 죽어라 키워서 다 귀족원으로 보내버릴 거다!!"라고 보수당과 귀족 사회를 협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어머니를 대신해 외국을 자주 순방한 경험과 그 자신이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친분이랑 혈연관계가 있다는 점을 활용해[14], 영국-프랑스-러시아의 3국협상을 성사시켜 독일을 견제하는데 힘을 발휘할 만큼 외교에 능통했다. 이걸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1903년에 행해졌던 프랑스 방문이다. 당시의 영불관계는 공적으로는 어쨌던간에 양국의 국민 관계는 여전히 안 좋았는데 에드워드 7세가 방문 중에 보여준 모습은 프랑스인들의 호감을 크게 얻었고[15] 영불협상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유럽 군주들의 대표급[16]이자 원로 대우를 받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프란츠 요제프 1세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친화력 덕분에 에드워드 7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제1차 세계 대전을 피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도 있다.

에드워드 7세와 빌헬름 2세
에드워드 7세와 외조카 빌헬름 2세.

외조카이자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에게 사탄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사이가 마냥 나쁘지는 않았다. 외삼촌의 대독일 외교정책에 대해서 빌헬름 2세는 뒤에서 궁시렁거릴지언정 감히 외삼촌에게 정면으로 덤빌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빌헬름 2세는 근본적으로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강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서 비롯된 영국 왕실에 대한 존중은 에드워드 7세때까지도 어느정도 남아있었고, 에드워드 7세가 외교에도 능했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인들은 국제 사회에서 영국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한 에드워드 7세를 피스메이커 에드워드라 부르며 지지했고, 전쟁이 싫다면 친절한 에드워드를 찾으라는 노래까지 유행할 정도였다. 물론 독일에서는 "뚱보 에두아르트[17]가 일만 생기면 독일에 반대한다"며 비난했다.

5. 사망과 장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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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5월 6일 6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영국에서는 에드워드 7세가 재위한 1901~1910년을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period)'라 부르며 엄숙주의 풍조가 만연했던 빅토리아 시대와 비교해 화사하고 자기 만족적인 시대로 기억한다.[18] 유해는 1910년 5월 20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성당에 안장되었다.

한편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 때 유럽 전역의 친척들을 포함한 주요 국가의 왕족들이 대거 참석해 장관을 이루었는데, 당시의 참석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특이하게 일본 제국과 만주 청나라의 황족도 있다. 당연하지만 을사조약이후이므로 대한제국에서는 참석자를 보내지 못했다.[19] 이들 중 많은 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적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20][21]
조문 명단
이름
비고[22]
영국 왕 조지 5세
에드워드 7세의 아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23]
코넛 스트래선 공작 아서
에드워드 7세의 동생.
에드워드 7세의 처남.
에드워드 7세의 조카사위.
에드워드 7세의 처조카 겸 사위.
에드워드 7세의 처남.
에드워드 7세의 6촌.
에드워드 7세의 6촌.
오스만 제국 황태자 유수프 이제틴 에펜디
압뒬아지즈의 아들.
러시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사촌. 1차대전기 이탈리아 육군 제3군 사령관.
일본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貞愛) 친왕
메이지 덴노의 사촌.
스파르타 공작 콘스탄티노스
뒷날의 그리스인의 왕 콘스탄티노스 1세. 에드워드 7세의 처조카 겸 조카사위.
루마니아 왕세자 페르디난드
뒷날의 루마니아 왕 페르디난드 1세. 에드워드 7세의 조카사위.
1차대전기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
1차대전기 독일 제4군 사령관
세르비아 공태자 알렉산다르
뒷날의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다르 1세.[24]
네덜란드 헨드릭 공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
에드워드 7세의 조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5세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
빌헬름 2세의 동생, 1차대전기 독일 발트해 함대 총사령관.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겸 조카사위.
에드워드 7세의 조카.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왕자
배스터요틀란드 공작 카를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프리드리히
이집트 알리 타우피크 왕자
타우피크 1세의 아들.
코넛 스트래선 공작 아서
에드워드 7세의 조카.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왕자
에드워드 7세의 처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알베르트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캐리스브룩 후작 알렉산더 마운트배튼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
파이프 공작 알렉산더 더프
에드워드 7세의 사위.
케임브리지 후작 아돌퍼스 케임브리지
테크의 프랜시스 공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에드워드 7세의 처조카. 필립 마운트배튼의 부친.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
바덴의 막시밀리안 왕자
몬테네그로 왕태자 다닐로 알렉산다르
그리스와 덴마크의 크리스토포로스 왕자
에드워드 7세의 처조카.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필립 왕자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
루이 도를레앙 왕자
피에르 도를레앙 왕자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왕자
발데크피르몬트의 볼라드 공자
태국의 포바라뎃 왕자
영국 왕대비 알렉산드라
에드워드 7세의 왕비.
러시아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
알렉산드르 3세의 황후, 니콜라이 2세의 모친, 에드워드 7세의 처제.
에드워드 7세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
에드워드 7세의 차녀.
에드워드 7세의 며느리.
에드워드 7세의 3녀.
콘월 공작 에드워드
에드워드 7세의 손녀, 조지 5세의 딸.
에드워드 7세의 누이.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에드워드 7세의 누이.
에드워드 7세의 누이.
코넛 스트래선 공작부인 루이즈
에드워드 7세의 제수.
올버니 공작부인 헬레나
에드워드 7세의 제수.
코넛 스트래선의 패트리샤 공주
에드워드 7세의 조카딸.
파이프의 알렉산드라 공주
에드워드 7세의 손녀.
파이프의 모드 공주
에드워드 7세의 손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헬레나 빅토리아 공주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마리 루이즈 공주
에드워드 7세의 외조카딸.
앨버트 왕자
뒷날의 조지 6세.
헨리 왕자
에드워드 7세의 손자.
하노버 컴벌랜드의 게오르크 빌헬름 왕자
청나라의 버일러 짜이타오(載濤)
광서제의 이복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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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모인 9개 나라의 군주들.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왕국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 국왕 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다. 앞줄은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6. 이야깃거리[편집]

  • 흔히 쾌락주의자나 바람둥이 왕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외로 동시대인들에 비해서 깨어있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던 왕이다. 종교개혁 이래로 영국 왕이 대관식을 치를 때 가톨릭 교리를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맹세를 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를 불관용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관습이라며 거부했다. 왕세자 시절 인도를 방문했을때도 현지 관리들에게 "피부색이 어둡다고 해서 야만인이라는 뜻은 아니다."라면서 인도인들을 차별대우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 사냥[25]과 도박, 여자, 파티를 즐기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유쾌한 성격으로 당대 사교계를 이끄는 명사였다. 다만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좋게 보지는 않았다. 사실 빅토리아 여왕도 젊은 시절엔 이런 유흥거리들을 매우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변했기에 에드워드는 어머니의 엄격함과 보수적인 면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어머니와 갈등하게 된다.
  • 경마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버버리사의 트렌치 코트(바바리 코트)를 애용해서 외출할 때마다 하인에게 '내 버버리 가져와(Bring my Burburry)'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훗날 버버리 사에서는 이 일화에서 이름을 따온 '마이 버버리'라는 향수를 내놓기도 했다.
  •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담배를 지독하게 싫어한 혐연가였지만, 에드워드 7세는 즉위식 만찬 때 "신사 여러분, 피워도 좋소!(Gentlemen, you may smoke!)"를 외칠 정도로 애연가였다. 하루에 시가 12대, 담배 20대나 피워댄 골초. 이 때문에 말년에는 기관지염과 폐질환에 걸리게 되었다.
  • 별명이 '배불뚝이(Tum-Tum)'인데, 이는 에드워드 7세가 하루 식사로 코스요리 정식을 10번이나 먹었을 정도로 대식가였기 때문에 왕이 될 때 허리 둘레가 48인치나 되는 비만이라서 붙여진 것이다.[26]
  • 어머니가 장수하여 오랜 왕세자 생활 끝에 간신히 왕이 된지라, 오랫동안 왕 노릇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7년 9월 9일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왕세자였다. 그런 그가 재위기간 10년을 못 채웠으니[27]... 얼마나 억울했으면 죽기 직전에 "아니, 포기하지 않겠네. 난 버텨내야 해. 마지막까지 내 일을 해야 한다고."라고 내뱉었겠는가.[28] 심지어 1910년 사망 당일 계속해서 심장마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29] 정무를 보다가 쓰러져 사망했다. 그래도 매형인 프리드리히 3세가 비슷한 나이대에 즉위해서 재위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한것에 비하면 낫다.
  • 매형인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묘하게 공통점이 많은데, 둘 다 황제인 부모가 장수해서, 꽤 긴 시간을 황태자 자리에 있었고[30], 황태자 시절에 손주를 봤으며, 부모보다 재위기간이 짦으며, 성격이나 성향도 부모님과는 반대였으며, 슬하에 아들과 딸의 숫자가 같으며[31], 골초였으며, 후계자인 아들들의 키가 본인들보다 작다.[32] 그리고 둘 다 "더 오래 재위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많은 군주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에드워드 7세는 바람둥이였던 반면 프리드리히 3세는 부부관계가 매우 좋았다.
  • 외조카인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게 사탄이라는 패드립을 당한 적이 있다.[33]
  • 한편 패션으로서의 세일러복 유행을 선도한 역사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위에 보이는 그림의 모습을 본 이후로 자기 자식에게 세일러복을 입히는 부모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 그가 유행시킨 다른 패션으로는 양복 조끼의 맨 밑단 단추를 잠그지 않는 것도 있다. 사실 너무 뱃살이 나오다보니 조끼 마지막 단추를 잠그지 않았던 것인데, 왕이 그러니까 모든 신사들이 따라하기 시작해서 유행이 되었다.
  • 1908 런던 올림픽을 개회했으며, 훗날 에드워드 7세의 손자증손녀도 각각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들을 개회했다.
  • 서브컬처에서 테디보이들이 입는 '에드워디안 수트' 또는 '에드워드 시대 수트'가 바로 이 에드워드 7세 시대의 수트를 이야기한다. 칼라가 높은 셔츠에 단추가 4개 이상 달린 긴 재킷이 특징.
  • 셜록 홈즈의 모험에 수록된 단편 '녹주석 보관'에서, 의뢰인인 은행가에게 문제의 보관을 담보 잡히고 돈을 빌려갔다는 익명의 고귀한 양반이 왕세자 시절의 에드워드 7세라는 설이 있다. 혹은 그의 방탕한 맏아들 앨버트 왕자였다고도 하고.
    그리고 셜록 홈즈의 사건집에 수록된 단편 '거물급 의뢰인'에 언급되는 고귀한 익명의 의뢰인은, 이견의 여지 없이 확실하게 에드워드 7세로 추정된다. 명문가의 아가씨가 어느 남작에게 홀딱 반해 결혼을 예정하고 있는데, 이 남작에게 온갖 더러운 뒷소문이 도는 터라[34] 익명의 거물이 대리인을 내세워 홈즈에게 그 결혼을 막아 달라고 요청하는 이야기. 사건이 해결된 후 대리인이 감사를 표하며 떠나는데, 이 때 왓슨 박사가 대리인의 마차에서 왕실 표장을 보고 놀란다. 작중 시점이 1902년, 에드워드 7세가 재위 중이던 시기였다. 항간에는 에드워드 7세가 유일하게 흥미를 가지고 완독한 책이 셜록 홈즈라는 얘기가 있다.
    그 외에도 셜록 홈즈가 실종된 마지막 사건 이후 벌어진 엄청난 파문 중에 코난 도일에게 (셜록 홈즈를 죽인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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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초[35]여서 그런지 시가 메이커 중에 킹 에드워드라는 제품의 이름은 에드워드 7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표지에도 에드워드 7세의 사진이 박혀있다.
  • 마찬가지로 파이프 담배의 연초 중 프린스 알버트라는 제품의 이름도 에드워드 7세에게서 따온 것이다. 위의 시가가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한 후의 명칭에서 따왔다면 이쪽은 왕세자 시절의 명칭인 알버트 대공에서 따온 것.
  • HMS 빅토리의 보존에 제일 큰 기여를 했다. 도크에서 반쯤 썩어가다가 해체될 뻔한 빅토리를 구한 것이 에드워드 7세였다.
  • 전혜진의 레이디 디텍티브에서는 아버지 앨버트 공의 그림자에 비교당하는 상황에 분노하여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을 녹여버리는 대형사고를 치게된다. 하지만 리지가 에드워드 7세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말에 빅토리아 여왕과도 화해를 하지만 한번씩 어머니 마음을 속썩이는 골치덩이 아들로 지낸다.

[1] 아버지(180cm)보다 키가 작다.[2] 에드워드 8세, 조지 6세 등.[3] 올라프 5세[4] 애칭은 버티.[5] 애칭은 비키.[6] 단 동양인들의 눈엔 약간 남상에다 조각처럼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지닌 알렉산드라 왕비보다는 그녀의 여동생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가 더 예뻐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는 이목구비가 귀엽고 아기자기하며 청순가련한 인상에다 키랑 체구도 매우 아담했다.[7] 알렉산드라 왕비의 초상화나 사진을 보면 다른 여성 왕족들과 비교했을 때 과도할 정도로 많은 목걸이를 목에 감고 있는데, 바로 이 흉터 때문이다.[8] 다만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 불감증인 여성은 매우 흔했다. 사실 여성의 불감증은 정말 신체적인 이유보다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나오는 억압이나 단순히 자신의 성향에 따른 심리적 요인이 더 크기 때문이다.[9]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세자의 후처 카밀라 파커 보울스의 증조할머니로 에드워드 7세의 마지막 애인. 뿌리깊은 왕기(王妓) 집안[10] 현재 노르웨이 국왕인 하랄 5세의 할머니이다.[11] 빅토리아 여왕이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알렉산드라 왕비도 에드워드 7세와의 불화로 인해 상처받자 자녀들 중 1명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자녀들에게 집착한 것이다.[12] 알렉산드라 왕비의 사진들을 보면 말년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 죄다 젋고 피부가 탱탱하게 나온 사진들밖에 없는데, 말년에 찍은 사진들은 전부 엄청난 뽀샵질(…)의 결과물이다. 물론 젋었을 때는 시씨의 라이벌 취급받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둘 다 결혼생활이 시궁창이었다는 점도 닮았다. 그나마 시씨 남편은 골수 아내덕후이기라도 했는데 알렉산드라는 남편에게도 버림받았다.[13] 훗날의 영국 제53대 총리.[14]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를 참조 바람.[15] 에드워드 7세가 영국으로 돌아갈 때 모인 자기나라 황제는 4명이나 쫒아낸 프랑스 군중들이 "우리 국왕 만세!(Vive notre roi!)"라고 외치며(!) 환호했다고. 출처 : 8월의 포성.[16] 대영제국 군주, 독일 제국 황제, 러시아 제국 황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17] 에드워드의 독일어식 바리에이션.[18] <엠마> 10권의 후일담 에피소드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메이드 제복부터 눈에 띄게 화사해진 것을 알 수 있다.[19] 다만 즉위식 땐 나름 황족이었던 의양군 이재각을 특명전권대사로 사절단을 보냈다. 그 사절단 일원이었던 이응종은 <<서사록>>이란 견문록을 남겼는데 영국을 비롯해 에드워드 7세에 대한 평가도 후하게 묘사되고 있다.#[20] 국가원수 자격으로 군을 통솔한 경우 외에도, 전통적으로 유럽에서 남자 왕족은 장교의 길을 걷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한 왕족들 중에서는 1차대전기에 자국군의 요직을 맡아 종군한 인물도 있었다.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을 맡은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이나 이탈리아 육군 제3군단 사령관을 맡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대표적 예시이다.[21] 1차대전의 시작을 묘사한 <8월의 포성> 도입부가 바로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 부분이다. "1910년 5월 아침, 영국왕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 참석한 아홉 명의 군주들로 구성된 가마행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엄숙하게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너무나도 화려한 이 광경에 놀라 탄성을 억제할 수 없었다. 군주들은 깃털로 장식된 헬멧, 금줄, 진홍색 복띠 그리고 보석이 박힌 훈장을 햇빛에 번쩍이며 주홍색, 청색, 녹색, 자주색의 화려한 복장으로 세 명씩 세 줄을 지어 왕궁 정문을 지나갔다. 뒤를 이어 다섯 명의 유족들, 사십 명이 넘는 왕족, 네 명의 태비와 세 명의 왕비들, 그리고 군주정 체제가 아닌 나라에서 온 특명 대사들의 무리가 뒤따랐다. 이들을 모두 합하면 칠십 개국을 대표하는 조문 사절로서 한 장소에 모인 이러한 종류의 집회로는 그 권위와 규모 면에서 사상 최대이자 최후의 사건이었다. 운구 행렬이 왕궁을 출발할 때 빅벤은 그 둔중한 종소리로 아침 아홉 시를 알렸으나 역사의 시계로 본다면 그때는 이미 황혼이었으며 바야흐로 구세계의 태양이 다시는 볼 수 없을 광영의 마지막 불꽃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22] 파란색은 연합국, 빨간색은 동맹국.[23] 누나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의 아들.[24] 당시에는 아니었지만 알렉산다르 또한 훗날 에드워드 7세의 외종손인 루마니아의 마리야와 결혼하여 인척 관계가 된다.[25] 당시 영국 왕실 표준시가 UTC+0:30이었던 것도 에드워드 7세가 사냥을 30분 더 하기 위해서였다. 에드워드 8세 이후로 다시 시간대는 원상복구되었다.[26] 다만 이런 대식 습관은 어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식가로 스테이크와 각종 채소를 넣고 포도주를 섞은 브라운 윈저 수프 같은 기름진 음식을 즐겼고, 여기에 양고기와 치킨과 해기스에 생크림을 얹은 딸기나 푸딩 및 토피 케이크(설탕과 버터를 끓여서 만든 케이크) 같이 달고 기름지며 칼로리가 높은 음식들을 좋아하다 보니, 50대에는 152cm의 키에 비해 76kg라는 무거운 체중을 갖게 되었다. 사실 빅토리아 시대에 영국 상류층들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는 대식가였다. 당시 영국 상류층들은 보통 햄, 혓바닥 고기, 꿩고기, 훈제 청어, 간, 달걀, 베이컨, 귀리를 가벼운 아침 식사로 먹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의 잡지들은 음식의 소화를 돕는다는 소화제 광고를 많이 실었다. 출처: 위엄가득 빅토리아 여왕/ 앨런 맥도널드 글/ 클리브 고다드 그림/ 김은숙 번역/ 주니어김영사/ 158~161쪽[27] 1901년 1월 22일부터 1910년 5월 6일까지 9년 105일동안 재위했다.[28] 원문은 "No, I shall not give in; I shall go on; I shall work to the end." 실제로 한 마지막 말은 이 말을 한 뒤에 조지 5세가 되는 아들에게서 에드워드 7세의 경주마가 경마에서 이겼다는 말을 듣고 한 말인 "그래, 아주 기쁘구나."라고 한다.[29] 사실 에드워드는 지나친 흡연으로 인해 말년에 궤양(기저세포암으로 피부병이었다.), 기관지염, 폐질환으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30] 다만 빅토리아 여왕이 18세의 나이에 즉위한 반면 빌헬름 1세는 63세의 늦은 나이에 즉위했다.[31] 프리드리히 3세는 4남 4녀, 에드워드 7세는 3남 3녀. 프리드리히 3세가 2명 더 많다.[32] 조지 5세는 168cm, 빌헬름 2세는 174cm.[33] 에드워드 7세가 외교 전략을 통해 독일을 견제했기 때문.[34] 전처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으나 어떻게 빠져나간 걸로 보인다. 또한 수많은 여자들을 정부로 삼아 농락한 뒤 버린 바 있다고. 과거에 그의 정부였던 한 여자가 "그 자는 우표를 모으듯이 여자를 수집한다. 자기가 신세를 망쳐 놓은 옛 여자들에 대해 기록해 놓은 책도 갖고 있다"고 언급한 걸 봐서, 여자들을 일종의 트로피나 수집품처럼 취급하는 아주 질이 나쁜 작자인 듯하다.[35] 매형인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도 골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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