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록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전기를 담은 음악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2018)'는 개봉 당시 우리나라에서 크게 흥행했다. 천만에 가까운 관객 수를 기록하며 2달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했다. 하지만 영화 속 자막 일부에는 젠더 차별적 시선이 담겨있다. 성별이 표면적으로 명시돼 있지 않은 원문을 한국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성별을 강조한 사례가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알게 모르게 젠더 차별 언어를 마주하고 있고, 이를 무심코 사용하게 된다. 영화제에서 영화, 드라마 등의 자막을 번역하는 번역가로 일하며 미디어 속 차별적 언어 사례를 연구하고 있는 김재민(통역번역대학원 한영 전공)씨를 만나봤다. 김씨는 "미디어 속 자막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며 “그렇기에 민감하게 번역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 영화에 나타난 젠더 차별 언어를 분석한 번역가 김재민씨. 이유민 기자
대중 영화에 나타난 젠더 차별 언어를 분석한 번역가 김재민씨. 이유민 기자

 

영화 속 젠더 차별 언어 사용을 분석하다

김씨는 여성주의를 다룬  다큐멘터리 ‘레즈비어니즘: 급진적 페미니스트’(2012)를 번역할 때 많은 고민을 했다. 작품 속 여성주의적 시각과 의도를 적절한 번역어로 옮겨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김씨는 자막을 통해 작품의 의도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고, 영화 번역에서 젠더 감수성의 중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는 대중 영화의 번역 자막에서 젠더 차별 언어가 사용되고 있는지와 그 양상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그는 ‘대중 영화 번역 자막의 젠더 차별 언어 사례’ 연구를 시작했다.

김씨는 대중 영화 20편에 나타난 젠더 차별 언어를 분석했다. 2004년 이후 역대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한 외국 영화 중 관객 수가 높은 20편을 선정했다. 김씨는 젠더 차별 언어의 유형을 4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불필요한 젠더 강조, 두 번째는 젠더 고정관념 및 편견 강화, 세 번째는 특정 젠더 비하, 네 번째는 성적 대상화였다. 그 결과 20편의 대중 영화 중 10편에서 24건의 젠더 차별 언어 사례가 나타났다. 특정 젠더를 낮춰 일컫는 어휘를 사용하는 ‘특정 젠더 비하 유형’의 사례가 10건 발견됐고, 그 중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2012)'의 자막에서는 8건이 발견됐다. 김씨는 이를 “영화에 매춘부가 등장하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그는 "매춘부의 지칭어로 대부분 여성을 낮추는 말이 쓰인다"며 "유교 가치관에 벗어나는 인물에 대한 한국의 적대감이 번역 과정에서 강화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레미제라블'의 번역 자막은 현재 네이버 시리즈온, 넷플릭스, 왓챠에서 제공되고 있다. 김씨는 "일부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수정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성에 대한 젠더 차별 언어 사용은 24건 중 1건으로 여성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영화 ‘아이언맨3(Iron Man3·2013)’에서는 ‘용감한 자', ‘부족의 전사'를 의미하는 ‘the braves’를 ‘남자들’로 번역했다. 김씨는 “(‘the braves’를 남자로 해석한 것은) 샤냥을 하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편견을 강화할 수 있는 번역"이라며 “성별이 명시되지 않은 단어이므로 ‘전사'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성별이 명시되지 않은 영어 단어에 대해 번역가가 임의로 여성이나 남성으로 특정하는 것은 남성은 진취적,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젠더 편견을 강화할 수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가 분석한 20편 영화 내에서 2016년 5월 이후 젠더 차별 언어가 이전보다 18건 적게 나타났다. 김씨는 이를 여성 인권에 대해 목소리가 높아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생긴 변화라고 봤다. 그는 “당시 여성들이 사건에 큰 공분을 느끼고 표출하며 젠더 이슈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에 차별어, 혐오 표현에 대한 사회적 허용이 달라졌고, 번역가들도 여성주의 관점에서 제작된 작품을 번역할 때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인도 영화로 살펴본, 문화 전달자로서 번역가의 중요성은

김씨는 “번역가가 젠더 차별뿐만 아니라 모든 편견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1일(수)~10일(금) 개최됐던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발리우드 영화 '뒤바뀐 신부들(Lost Ladies·2024)'을 번역하며 영화를 통해 낯선 타국 문화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번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번역가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우리말로 바꿔 전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번역가는 표현과 말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번역가는 자막을 통해 잘못된  고정관념이 재생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요."

그가 번역한 '뒤바뀐 신부들'은 같은 기차에서 길을 잃은 두 어린 신부가 남편에게서 벗어나 모험을 떠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영화로, 결혼할 때 여성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가부장적인 인도 사회 전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뒤바뀐 신부들’을 번역하며 부부 사이 호칭 문제를 신중히 다뤘다. “젠더 불균형을 나타내기 위해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을,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번역하면 관객에게 인도 문화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올바른 언어는 젠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김씨는 이러한 목표 의식으로 ‘대중 영화 번역 자막의 젠더 차별 언어 사례’의 후속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번역이 젠더 평등의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번역가의 역할이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가 존중받는 번역을 위해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표현들이 무엇인지 살피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발리우드: 인도 뭄바이의 인기있는 영화 산업을 일컫는 비공식 이름으로, 미국의 할리우드를 빗댄 인도의 영화 산업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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